넬슨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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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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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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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555,#aaaaaa ||<tablewidth=100%><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1901 ||<-2> 1902 || || [[파일:스위스 국기.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스위스 국기.svg|width=40]] || [[파일:스위스 국기.svg|width=40]] || || [[앙리 뒤낭]] || 프레데리크 파시 || [[엘리 뒤코묑]] || [[샤를 알베르 고바]]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03 || 1904 || 1905 || 1906 ||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width=40]] || || 윌리엄 크리머 || 국제법학회 || [[베르타 폰 주트너]] || [[시어도어 루스벨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1907 ||<-2> 1908 || ||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덴마크 국기.svg|width=40]] || || 에르네스토 모네타 || 루이 르노 || 클라스 아르놀드손 || 프레데리크 바예르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1909 || 1910 || 1911 ||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40]] || -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40]] || ||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 국제평화국 || 알프레트 프리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11 || 1912 || 1913 || 1917 || || [[파일:네덜란드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40]] || [[파일:적십자 기.svg|width=40]] || || 토비야스 아서르 || 일라이휴 루트 || 앙리 라퐁텐 || [[국제적십자위원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19 || 1920 ||<-2> 1921 ||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노르웨이 국기.svg|width=40]] || || [[우드로 윌슨]] || 레옹 부르주아 || [[얄마르 브란팅]] || 크리스티안 랑에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22 ||<-2> 1925 || 1926 || || [[파일:노르웨이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 [[프리드쇼프 난센]] || [[오스틴 체임벌린]] || [[찰스 G. 도스]] || [[아리스티드 브리앙]]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26 ||<-2> 1927 || 1929 || ||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페르뒤낭 뷔숑 || 루트비히 크비데 || [[프랭크 켈로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30 ||<-2> 1931 || 1933 ||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나탄 쇠데르블룸 || [[제인 애덤스]] || 니콜라스 버틀러 || 노먼 엔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34 || 1935 || 1936 || 1937 ||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40]] ||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아서 헨더슨 || [[카를 폰 오시에츠키]] || 카를로스 라마스 || 로버트 세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38 || 1944 || 1945 || 1946 || || [[파일:국제연맹 기.png|width=40]] || [[파일:적십자 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난센 국제난민 사무국 || [[국제적십자위원회]] || [[코델 헐]] || 에밀리 발치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46 || 1947 || 1949 || 1950 ||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Quaker_star-T.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 [[존 모트]] || [[퀘이커(종교)|퀘이커 봉사협회]] || 보이드 오어 || 랠프 번치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51 || 1952 || 1953 || 1954 ||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 레옹 주오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조지 C. 마셜|조지 마셜]] ||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57 || 1958 || 1959 || 1960 || ||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width=40]]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 [[레스터 피어슨]] || 도미니크 피르 || 필립 베이커 || 앨버트 루툴리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61 || 1962 || 1963 || 1964 ||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파일:적십자 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다그 함마르셸드]] || [[라이너스 폴링]] || [[국제적십자위원회]] || [[마틴 루터 킹]]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65 || 1968 || 1969 || 1970 || || [[파일:유니세프 로고.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국제노동기구 로고.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유니세프]] || 르네 카생 || [[국제 노동 기구]] || [[노먼 볼로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71 ||<-2> 1973 || 1974 || || [[파일:독일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파일:베트남 국기.svg|width=40]] ||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40]] || || [[빌리 브란트]] || [[헨리 키신저]] || 레득토 || [[사토 에이사쿠]]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74 || 1975 ||<-2> 1976 || || [[파일:아일랜드 국기.svg|width=40]] ||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숀 맥브라이드 || [[안드레이 사하로프]] || [[베티 윌리엄스]] || [[메어리드 코리건]]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77 ||<-2> 1978 || 1979 || || [[파일:국제앰네스티 로고.svg|width=40]] ||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width=40]] || [[파일:이스라엘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 국기.svg|width=40]] || || [[국제사면위원회]] || [[안와르 사다트]] || [[메나헴 베긴]] || [[테레사 수녀]]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80 || 1981 ||<-2> 1982 || ||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멕시코 국기.svg|width=40]] || || 아돌포 에스키벨 ||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 [[알바 뮈르달]] || 알폰소 가르시아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83 || 1984 || 1985 || 1986 || ||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레흐 바웬사]] || [[데즈먼드 투투]] ||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 [[엘리 비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87 || 1988 || 1989 || 1990 || || [[파일:코스타리카 국기.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티베트 국기.svg|width=40]] || [[파일:소련 국기.svg|width=40]] || || [[오스카르 아리아스]] || [[유엔 평화유지군]] || [[달라이 라마 14세]] || [[미하일 고르바초프]]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91 || 1992 ||<-2> 1993 || || [[파일:미얀마 국기(1974-2010).svg|width=40]] || [[파일:과테말라 국기.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 [[아웅산 수치]] || [[리고베르타 멘추]] || [[넬슨 만델라]] ||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3> 1994 || 1995 || || [[파일:이스라엘 국기.svg|width=40]] || [[파일:이스라엘 국기.svg|width=40]] ||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width=40]] || [[파일:폴란드 국기.svg|width=40]] || || [[이츠하크 라빈]] || [[시몬 페레스]] || [[야세르 아라파트]] || 조지프 로트블랫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95 ||<-2> 1996 || 1997 || || [[파일:캐나다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퍼그워시 회의 || 카를로스 벨로 || [[조제 하무스오르타]] || [[조디 윌리엄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97 ||<-2> 1998 || 1999 || || - || [[파일:아일랜드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국경없는의사회의 로고.svg|width=40]] || || 지뢰금지국제운동 || [[존 흄]] || [[데이비드 트림블]] || [[국경없는의사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0 ||<-2> 2001 || 2002 ||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가나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김대중]] || [[유엔]] || [[코피 아난]] || [[지미 카터]]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3 || 2004 ||<-2> 2005 || || [[파일:이란 국기.svg|width=40]] || [[파일:케냐 국기.svg|width=40]] || [[파일:국제원자력기구 깃발.svg|width=40]] || [[파일:이집트 국기.svg|width=40]] || || [[시린 에바디]] || [[왕가리 마타이]] || [[국제원자력기구]] ||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06 ||<-2> 2007 || ||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width=40]] ||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 || [[무함마드 유누스]] || [[그라민 은행]] || [[앨 고어]] ||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패널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8 || 2009 || 2010 || 2011 || || [[파일:핀란드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파일:중국 국기.svg|width=40]] ||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width=40]] || || [[마르티 아티사리]] || [[버락 오바마]] || [[류샤오보]] || [[엘런 존슨 설리프]]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11 || 2012 || 2013 || ||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width=40]] || [[파일:예멘 국기.svg|width=40]] || [[파일:유럽 연합 깃발.svg|width=40]] || [[파일:화학무기금지기구 로고.svg|width=35]] || || [[리마 보위]] || [[타우왁쿨 카르만]] || [[유럽연합]] || [[화학무기금지기구]]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14 || 2015 || 2016 || || [[파일:파키스탄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 국기.svg|width=40]] || [[파일:튀니지 국기.svg|width=40]] || [[파일:콜롬비아 국기.svg|width=40]] || || [[말랄라 유사프자이]] ||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 [[후안 마누엘 산토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17 ||<-2> 2018 || 2019 || || - ||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svg|width=40]] || [[파일:이라크 국기.svg|width=40]] || [[파일:에티오피아 국기.svg|width=40]] || || [[핵무기 폐기 국제 운동]] || [[드니 무퀘게]] || [[나디아 무라드]] || [[아비 아머드]]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20 ||<-2> 2021 || 2022 ||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필리핀 국기.svg|width=40]] || [[파일:러시아 국기.svg|width=40]] || [[파일:러시아 국기.svg|width=40]] || || [[세계식량계획]] || [[마리아 레사]] || [[드미트리 무라토프]] || [[안드레이 사하로프|메모리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22 || 2023 || || ||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width=40]] || [[파일:벨라루스 국기.svg|width=40]] || [[파일:이란 국기.svg|width=40]] || || || [[시민자유센터]] || [[알레스 발랴츠키]] || [[나르게스 모하마디]] || ||


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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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1777년1779년1781년
조지 워싱턴소장 호레이쇼 게이츠소장 앤서니 웨인사령관 헨리 리 3세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1787년1800년1805년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존 폴 존스대령 토머스 트럭스턴준장 에드워드 프레블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컵 존스
1813년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1814년, 1848년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소장 제이컵 브라운소장 윈필드 스콧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1815년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소장 알렉산더 마콤소장 앤드루 잭슨대령 찰스 스튜어트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1835년1846년, 1847년, 1848년1847년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소장 재커리 테일러소머스 호의 장교 및 승무원 구출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1863년1864년1866년1867년
프레더릭 로즈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코닐리어스 밴더빌트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1871년1873년1874년, 1904년1883년
조지 피보디조지 F. 로빈슨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존 혼 주니어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1890년1900년1902년1909년
조지프 프랜시스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중위 프랭크 H. 뉴컴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1914년1915년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폴 H. 크라이봄 그 외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1929년1930년1936년
토머스 에디슨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들소령 월터 리드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링컨 엘즈워스
1936년1938년1939년1940년
조지 코한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목사 프랜시스 퀸윌리엄 시넛
1942년1945년1946년
롤런드 바우처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멤버들미합중국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미합중국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준장 빌리 미첼
1949년1954년1955년1956년1958년
앨번 W. 바클리어빙 벌린조너스 소크 박사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들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1960년1961년1962년
로버트 고다드로버트 프로스트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밥 호프샘 레이번
1962년1968년1969년1973년1977년
미합중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월트 디즈니윈스턴 처칠로베르토 클레멘테매리언 앤더슨
1978년1979년
중장 아이라 C. 이커로버트 F. 케네디존 웨인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1980년1982년
미국 적십자케네스 테일러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베아트릭스 여왕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1983년
프레드 워링조 루이스루이스 라머레오 라이언대니 토머스
1984년1985년
해리 S. 트루먼레이디 버드 존슨엘리 비젤로이 윌킨스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1987년1988년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에런 코플런드메리 래스커제시 오언스
1988년1990년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로런스 록펠러대장 매튜 B. 리지웨이대장 노먼 슈워츠코프대장 콜린 파월
1994년1996년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마더 테레사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리틀록 9인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시어도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찰스 M. 슐츠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족 코드 토커
2002년2003년
대장 휴 셸턴토니 블레어재키 로빈슨도러시 하이트 박사조지프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달라이 라마 14세바이런 넬슨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아웅 산 수 치콘스탄티노 브루미디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2010년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들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무함마드 유누스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2011년2012년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남녀들라울 발렌베리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들미국의 공군 에이스들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들시몬 페레스모뉴먼츠 맨
2014년2015년2016년
제65 보병연대잭 니클라우스셀마 몽고메리 행진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들OSS
2017년2018년
밥 돌래리 도비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들USS 인디애나폴리스의 승무원들안와르 사다트
2019년
스티브 글리슨캐서린 존슨크리스틴 다든도로시 본메리 잭슨
2019년2020년2021년
무명의 수여자들그렉 르몬드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및 컬럼비아구 경찰청 소속 경찰관들제369 보병연대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2023년
미 육군 제23 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들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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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10월 28일10월 28일아이샤 디오리영부인니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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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6월 27일7월 5일조세핀 봉고영부인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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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6월 29일틍쿠 아프잔왕비말레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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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7월 6일이멜다 마르코스영부인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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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10월 13일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영부인코스타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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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3월 10일3월 15일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대통령수단
1983년3월 10일3월 15일부띠나 칼릴 압불핫산영부인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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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9월 10일누르왕비요르단
1984년4월 9일하사날 볼키아국왕브루나이
1984년4월 21일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국왕카타르
1984년8월 30일9월 13일다우다 자와라대통령감비아
1984년8월 30일9월 13일치렐 자와라영부인감비아
1985년5월 17일무함마드 지아울하크대통령파키스탄
1985년5월 20일루이스 알베르토 몽헤대통령코스타리카
1986년9월 4일4월 10일엘리자베스 2세국왕영국
1986년9월 4일4월 16일보두앵국왕벨기에
1987년4월 7일아메드 압달라대통령코모로
1988년11월 3일이스칸다르국왕말레이시아
1988년11월 3일자나리아왕비말레이시아
1989년11월 3일11월 20일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대통령서독
1989년11월 3일11월 30일프랑수아 미테랑대통령프랑스
1989년11월 3일11월 30일다니엘 미테랑영부인프랑스
1990년6월 21일안드레스 로드리게스대통령파라과이
1990년11월 5일괸츠 아르파드대통령헝가리
1991년9월 13일아즐란 샤국왕말레이시아
1991년9월 13일투안쿠 바이눈왕비말레이시아
1991년9월 25일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대통령멕시코
1992년8월 13일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대통령과테말라
1993년5월 20일5월 25일피델 발데즈 라모스대통령필리핀
1993년5월 20일5월 25일이멜리타 마르띠네즈 라모스영부인필리핀
1994년11월 7일11월 21일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대통령칠레
1994년12월 5일12월 9일레흐 바웬사대통령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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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2월 21일3월 6일로만 헤어초크대통령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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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10월 8일10월 20일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왕비스페인
1996년11월 26일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국왕말레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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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2월 22일3월 6일자크 시라크대통령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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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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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 제8대 대통령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
Nelson Rolihlahla Mandela
파일:external/www.apag.us/Yousuf_Karsh_Nelson_Mandela_1990.jpg
출생1918년 7월 18일
남아프리카 연방 케이프주 음베조[1]
사망2013년 12월 5일 (향년 95세)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우텡주 요하네스버그
재임기간제8대 대통령
1994년 5월 10일 ~ 1999년 6월 14일
링크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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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아버지 가들라 헨리 음파카니스와 만델라
어머니 노세케니 파니
배우자에블린 마세 (1944년 결혼 / 1957년 이혼)
위니 마디키젤라만델라 (1958년 결혼 / 1996년 이혼)
그라사 마셸 (1998년 결혼)
자녀7명
신체185cm
학력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 (중퇴)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 명예 법학 학사
국적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종교개신교 (남아프리카 감리교회)
소속 정당
아프리카 국민회의}}}
남아프리카 공산당

1. 개요
2. 생애
2.1. 투사 만델라
2.2. 대통령 만델라
3. 평가
4. 사망
5. 저명인사들과의 인연
6. 기타
7. 어록
8.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절대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 흑인 민권 운동가.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보통선거 실시 이후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국가적으로 존경받는 인물로 사실상 남아공의 국부(國父)다.

애칭이자 존칭으로 마디바(Madiba, 말 그대로 "어른")[2]라고 많이 불린다. "아버지"를 뜻하는 타타(Tata)로도 가끔 불리며, 혹은 "훌륭하다", "위대하다"는 뜻을 지닌 쿨루(Khulu)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편집]



2.1. 투사 만델라[편집]


파일:attachment/mandela-mulroney.jpg
1990년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elson_Mandela-2008_%28edit%29.jpg
2008년의 모습
파일:347475_gallery.jpg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모습

1918년 7월 18일 목요일에 남아프리카연방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코사족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3]라는 뜻의 롤리랄라(Rolihlahla)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받았다.[4] 넬슨(Nelson)은 초등학생 때 교사가 지어준 영어식 이름인데 이후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는 그의 정식 이름이 되었다. 16세 때 성인식을 치른 뒤 얻은 이름 달리붕가(Dalibhunga)는 '새로운 권력자' 를 뜻했다. 16세 때 치른 이 성인식은 할례, 즉 포경수술인데, 마취없이 성인식을 했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 만델라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 정도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게 참을 수 있어야 된다"면서 포경수술을 찬성하였다. 남아공의 원주민에게 포경수술은 성인식으로 행해지는 풍습이다.

학교에 가게 된 만델라는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내용들[5]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으며, 축구와 복싱, 장거리 달리기 등의 운동도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사망한 아버지 대신 그를 돌봐주던 후견인이자 족장이였던 욘긴타바 달린드예보(Jongintaba Dalindyebo)에게서 아프리카의 역사와 진실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된 후 흑인들을 위해 일하는 꿈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땐 막연히 후견인인 달린드예보가 추장으로서 재판을 집행[6]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부족을 위해 일하는 법 상담자가 되기 원했으나,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치고 나서는 넓은 세계를 보고 감명 받으면서 본격적인 변호사의 꿈을 꾸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그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으며 특히 강제 결혼을 시키려는 후견인을 피해 친구 올리버 탐보[7]와 함께 도망가 위장취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확한 내막은 만델라가 법대에서 주는 학식에 불만[8]을 가지고 투쟁을 벌였다가 정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후견인 달린드예보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여 투쟁을 중단하고 학업에 정진하라고 했지만 만델라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강제 결혼을 시키게 된 것. 강제 결혼에 만델라는 도망갔지만 끝내 사람을 보내 수소문한 달린드예보에 의해 그들의 행방도 알려지게 되었고 탐보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만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한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nelson-mandela-you_2466638c.jpg

복귀 후엔 훗날 남아공 민주화 운동을 함께 이끌게 될 동지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 절친 올리버 탐보까지 재회, 합세하여 셋이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를 일으켜 나가게 된다.[9] 아프리카 민족회의(혹은 아프리카 국민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로서 남아공 옛 백인 정권의 악명 높았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10] 맞선 투쟁활동을 벌이게 된 만델라와 ANC는 처음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받아들여 평화적 투쟁방법을 모색하였으나 현실은 시궁창. 남아공 정권이 친영국파인 연합당에서 반영국파인 국민당으로 옮겨졌는데, 문제는 이들이 연합당보다 몇배는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은 백인 우월주의에 꽉찬 놈들이라 원래 있던 암묵적인 사회적인 차별까지 법으로 확실히 새기는건 물론이고 거주지 이전법안까지 통과시키며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정식적으로 열고, 게리맨더링의 일환으로 컬러드의 투표권을 박탈하며 일당체제를 구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리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경찰을 보고 만델라는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국민당과 싸우기 위한 군대를 만들기 위한 책임자가 된 만델라는 이 조직의 이름을 '민족의 창(Unmkhonto we Sizwe)'이라고 한다. 줄인 이름은 'MK'. 아프리카 민족회의에는 백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MK는 진보계열의 백인들[11]까지 모두 받아들였다. 이후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사보타주와 테러[12]를 행하다 결국 당국에 체포되어 종신형[13]을 선고받고 무려 27년 동안 투옥되었다. 총 27년의 기간 중 로벤 섬에서 18년을 생활하였고, 이후 일정 기간은 국제 여론에 압박을 느낀 남아공 정부에 의해 감옥이 아닌 교도관의 집에서 보내게 된다.[14] 이러한 장기간의 수감생활로 인해 자식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모친과 맏아들이 사망했을때에도 장례식에 참석을 할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수감생활 속에서도 남아공 대통령들에게 편지를 쓰고 ANC 회원들과 연락을 하는 등 할 것은 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고된 시간이었음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투쟁을 통해 교도소의 환경을 개선시킨다거나 하는 일을 벌였다. 그가 갇혀 있는 동안 남아공의 흑인들과 해외 재야인사들이 석방운동을 줄기차게 벌였고, 1988년에는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에릭 클랩튼스티비 원더 등 유명 뮤지션 83명이 그의 70세 생일 기념 콘서트를 열어 석방을 촉구했다.

파일:external/static.guim.co.uk/Nelson-Mandela-and-wife-W-010.jpg

그리고 드디어 1990년, 국내외 여론의 압박을 못이긴 F. W. 더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의 석방과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합법화를 발표하여 그를 석방한다. 이후에 당시 남아공 정부와 국민당, 민주당, 인도계 정당, 컬러드계 정당들과 협상을 벌여서 1991년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시키고, 1993년에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만듬으로써 그해 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협상 후반기엔 극우정당인 보수당[15]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이 협상에 반발하고 잉카타 자유당은 협상에 나섰다가 파기하다를 반복하고 ANC와 갈등을 벌여 한때 남아공은 내전으로 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지만, 반투스탄내 기득권층은 반투스탄 내 흑인들의 반발에 결국 굴복했고, 보수당은 자멸함에 따라 대다수 흑인들에게 첫 투표권이 주어진 1994년 총선이 치러졌고, 이 선거에서 ANC가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함에 따라(252/400 62.7%) 국민당, 잉카타 자유당과 거국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잉카타 자유당과의 분쟁도 진정되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16]


2.2. 대통령 만델라[편집]


파일:external/latimesphoto.files.wordpress.com/nelson-mandela1994-6_drev7igy.jpg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정부에 있던 모든 백인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해 과거의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한 진실을 낱낱이 밝혔지만 그들을 사면했다. "용서하되 잊진 않는다."란 슬로건 아래 단 한 명도 과거사로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시 남아공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덕분에 당시 많은 남아공 백인들이 남게 되어 그들의 사회, 경제적 영향력까지 흡수할 수 있었다. 만델라가 사망하였을 때도 일각의 우려와 달리 큰 변화는 없었다.

만델라는 자신의 수감생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P. W. 보타 전 대통령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1984년, 만델라는 코에체 장관에게 보타 대통령과의 협상을 요청했다. 그러나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 온 만델라에게 보타는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되려 보타 대통령은 만델라에게 "폭동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석방을 허락해 주겠다."라는 제안을 하는데, 당연히 국제사회에서 남아공이 받는 비난 여론을 무마할 계획에 그런 말을 꺼냈겠지만, 만델라가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보타와 만델라 두 사람 간에는 찬 바람만이 오가게 되었다. 이후 1998년, 만델라가 재임 중이던 남아공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보타를 청문회에 출석하라고 통보했는데 보타는 거절을 해버렸다.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는 정당하다." 라는 망언을 하다 2006년 노환으로 죽었다.

훗날 만델라는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감옥 생활을 하면서 복수심이 아닌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만약 내가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 즉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옥에 앉아서 생각할 기회는 바깥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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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 선수권 일화도 유명한데, 당시 전형적인 백인 스포츠[17]로 흑인들은 오히려 다른 나라를 응원했을 정도로 흑백 갈등의 상징이었던 럭비를 만델라는 흑백이 하나되는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만델라는 1명을 제외하고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럭비 대표팀을 수시로 찾아가 설득하고 격려하며 선수들의 마음을 열었다. 대회 직전에는 대표팀이 흑인 어린이들에게 럭비를 직접 가르쳐주는 행사까지 마련했다. 결승전에서 만델라는 주장 등번호 6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기적처럼 남아공 럭비 대표팀은 뉴질랜드 대표팀을 꺾고 우승했고 그 날은 남아공 전체의 축제일이 되었다. 우승 트로피를 백인 주장에게 전달한 것 역시 만델라였다. 이후 이 스토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2009년 개봉 영화 인빅터스에서 영상화되었다. 만델라 역은 모건 프리먼, 럭비팀 주장 프랑수아 역은 맷 데이먼이 맡았다.

1999년 옛 동지 고반 음베키의 아들인 타보 음베키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고 퇴임했다.[18] 존경받다 권력자가 된 후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독재자의 길로 접어든 많은 사례에서 볼 때 단임으로 깔끔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훌륭한 업적이라면 업적.

국내에는 1995년과 2001년 두 번 방한했으며 첫 방한 시에는 서울대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19] 두 번째 방한 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다. 이후 김 대통령 사망 당시 만델라 재단에서 애도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여담으로 두 번째 방한 당시 모 방송사에서 만델라 부부의 투쟁기를 다룬 영화를 틀어주었는데 하필 그때가 부인과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여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대선에 출마하자 자신의 딸을 통해 27년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함께 한 낡은 시계를 선물하였다.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 탄압을 받으며 20년간 사용한 낡은 가방을 선물하였다. 또한 만델라의 자서전을 번역한 것도 김대중 전 대통령.[20]


3. 평가[편집]


사회 운동가 시기 만델라의 업적은 지금도 국내외적으로 호평을 받는다.

대통령 시기 업적에 대해선 대체로는 좋게 평가되지만 약간의 비판도 있다.

일단 정치적인 수완으로 봤을 때는 의회 구성 문제로 당시 지리해져가던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맺었으며,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반대한 극우 백인들과 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의 반발, 잉타카 자유당과의 또다른 분쟁으로 남아공이 거의 내전 상태까지 갈 뻔 했던 것을 진화시켜 남아공을 안정시켰다. 허나 후에 그의 후배들이 일으킨 부정부패나 추문이 일어나는걸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인종간 내전이 벌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벌어졌던 만행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처분했고 재산몰수같은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에 넬슨 만델라가 백인들한테도 많이 존경받는다.

이처럼 흑백 간의 갈등을 아우르고 남아공의 분열을 막은 성과를 낸 만델라였지만 그의 집권 시기에 남아공의 빈부격차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있다. 실제 그의 집권 시기 남아공 경제는 꽤 성장했지만[21] 기업가와 정기적으로 회동하던 만델라가 당시 트렌드였던 신자유주의적 경제관을 받아들여 그 과실은 백인과 일부 부자 흑인들만 나눠가졌다는게 요지. 물론 애초에 사회민주주의 성향이 있던 만델라도 분배 정책에 신경을 안쓴건 아니라 예를 들어 흑인 경제력 강화(BEE) 프로그램이라 해서 수탈당하던 흑인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을 줌으로써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일부 흑인만 혜택을 입어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다는 것.

그래서인지 지니계수가 많이 높아진 2010년대 중반 남아공 현지에선 만델라가 흑인의 배신자라는 식의 벽보가 붙는 일도 종종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남아공에서 만델라는 여전히 위대한 어르신(Madiba) 취급받기에 다수를 대표하는 견해라고 볼 순 없지만, 남아공 내에도 반(反) 만델라 세력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애초에 여러 견해가 나오는게 민주주의 사회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만델라 입장에선 좀 억울 할 법도 한게,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남아공만큼 사는 나라가 몇 없다. 다수는 저성장과 빈부격차, 독재 공격을 동시에 맞고 있는게 아프리카 현실이다. 당장 이웃나라 짐바브웨의 독립투사에서 경제 폭망의 원흉이 되어버린 로버트 무가베가 있다. 게다가 현재 남아공의 빈부격차는 후임자들이 훨씬 심화시킨 케이스라 이 부분에선 오히려 만델라가 재평가되기도 한다.


4. 사망[편집]


2009년 쯤부터 노환으로 병세가 나타나다 2013년 12월 5일 요하네스버그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 고난했던 행보에도 불구하고 장수했다. BBC/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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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

만델라가 타계한 후 전세계에선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구글은 메인 페이지에 만델라를 추모하며 그의 인생을 돌아보는 만델라 재단의 페이지로 링크를 걸어놨다. 한국어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2014년 7월 18일 넬슨 만델라 두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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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홈페이지 아카이브

Amazing human being. Champion of freedom and human dignity. He set an example for all of the world. RIP Nelson Mandela. We miss you alre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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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타계 다음날 올라온 팀 쿡의 트윗

애플의 CEO 팀 쿡은 "위인.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대변자. 그는 세계 모든 이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평안히 쉬소서, 넬슨 만델라. 우리는 벌써 당신이 그립습니다" 라는 트윗을 올렸고 애플 홈페이지스티브 잡스의 사망 직후 스티브 잡스를 추모했던 것처럼 그의 사진, 이름, 출생년도 및 사망년도를 띄워 그를 추모하였다.

12월 10일 열린 추모식에는 미국흑인 대통령버락 오바마[22],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나루히토 일본 황태자[23],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 등 세계 91개국 정상급 인사, 왕족들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는 당시 정홍원 국무총리가 대표로 참석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남아공은 영웅이자 아버지를 잃었고, 세계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스승을 잃었다."며 애도했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만델라의 투쟁은 당신의 투쟁이었고, 그의 승리는 당신의 승리였다"면서 "만델라는 한 국가를 정의의 길로 이끌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역사의 거인"이라고 그의 삶을 평가했다.

토크쇼의 여왕오프라 윈프리, 락그룹 U2의 보컬 보노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인 제시 잭슨 목사도 참가했으며 추모식이 열린 요하네스 FNB 경기장[24]에는 10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만델라를 추모했다.

한편, 미국의 보수 정치인들도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추모에 동참했는데, 이에 뿔난 일부 극우파 네티즌들은 피델 카스트로와 친하고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만델라는 공산주의자라는 색깔론성 비난을 하기도 했다.#

헌데 이 추도식에서 수화 통역사가 아무 의미 없는 손동작을 한 걸로 밝혀졌다. 정신분열을 앓고 있었는데 갑자기 환청이 들려서 어쩔 줄 몰라했다는 듯. AP 인터뷰, CNN, BBC, ITN 남아공의 국가기간방송인 SABC에서 이를 알아챘는지 추도식을 중계하던 도중 자체 수화통역사를 급히 투하해 화면에 띄웠다. 당사자와의 인터뷰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장례식은 12월 15일 국장으로 열렸다. 'Hamba Kahle, Madiba!!'(함바 칼레, 마디바!/잘 가요, 어르신!)

남아공 정부는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의 정부청사 앞에 만델라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황당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동상을 건립한 후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동상의 귀 안에 작은 토끼 동상이 만들어져 있던 것. 동상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동상 제작 시간이 촉박해 어려움을 겪은데다 동상에 서명도 남기지 못하게 한 점에 불만을 가져서 이런 행위를 했다고 한다.[25] 그러나 "하필 장난을 해도 만델라 동상에 하냐"는 여론의 비난을 받고 토끼를 제거하기로 했다.


5. 저명인사들과의 인연[편집]



5.1. 버락 오바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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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워싱턴 DC의 한 호텔에서 면담 중인 오바마와 만델라. 당시 오바마는 연방 상원의원이었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와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땔레야 땔 수 없는 관계였다. 비록 두 사람이 생전 직접 대면한 것은 단 한차례에 불과하지만, 만델라 생전 서로에 대해 좋은 평가를 많이 내렸고 오바마는 만델라에 대해 여러차례 존경심을 표한 바 있었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만델라의 선례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오바마는 1995년 발간한 자서전에서도 그를 통해 정치를 시작했으며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오바마는 만델라 추모 연설에서, 갓 대학에 들어갔던 1979년 만델라를 처음 알게 되어 그의 사상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한 당원으로부터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이러한 상황에 분개해 정치 참여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오바마가 생전 처음으로 한 대중 연설이 바로 옥시덴탈 대학교에서 열린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집회에서의 연설이었다. 오바마는 인권변호사 활동을 거쳐 1992년 빌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의 선거 캠프에 참여하며 정치에 입문했고, 19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7년간 재직하다가 2004년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때 오바마는 2004년 미국 대선 후보로 나선 존 케리 후보에 대한 찬조연설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고, 흑인 정치인들 중에서 대권에 가까워진 유력 후보로 급부상하게 된다.

두 사람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은 2005년 5월 17일, 만델라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위싱턴 DC의 한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오바마는 만델라의 호텔 방으로 직접 찾아가 짧게 면담을 간졌는데, 만델라는 이 때 오바마를 격려하며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당시 만델라는 고령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면담을 했으며, 오바마는 만델라가 말하는 내내 선 채로 그의 덕담을 들었다. 이 후 2008년 오바마가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만델라는 축하 서한을 보내며 그의 당선을 기뻐했다.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기간 두 사람은 만남을 추진하였으나, 끝내 두 번째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2011년 영부인 미쉘 오바마가 남아공을 방문해 그의 자택에서 만델라와 가족들을 예방하였고, 오바마는 종종 만델라에게 전화를 걸어 정책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만델라는 오바마의 2기 임기 중 사망했는데, 오바마는 "우리 시대의 가장 용기있는 사람이 떠났다" 는 내용의 추모 성명을 발표하고 직접 그의 추도식에 참석해 연설했다.

우리는 다시는 넬슨 만델라 같은 분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세상 모든 곳의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도 만델라가 보여준 일들을 당신의 일로 만들 수 있다고 말입니다. 30여년 전, 학생이었던 나는 넬슨 만델라를 알게 되었고, 그가 이 아름다운 땅(남아프리카)에서 이끌었던 투쟁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내 안의 무엇인가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나에게 다른이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여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만델라 그분에 비한다면 항상 모자른 존재일테지만, 그는 항상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원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는 내 안에 무엇이 최선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5.2. 김대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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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 청와대에서 회담 중인 만델라-김대중

김대중 전(前) 대통령과는 1980년대부터 인연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인종차별과 독재라는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청산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고, 이 때문에 부당한 권력에 찍혀 오랜 시간동안 옥살이를 했다는 점이 매우 유사하다. 만델라는 무려 27년동안 감옥에 투옥되었고, 김대중은 6년 이상의 감옥 살이는 물론 도쿄에서 납치되어 죽을 뻔하다가 구출되는 등 여러차례 목숨을 위협받으며 투쟁하였다. 또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두 사람 모두 과거의 정적에 대해 탄압이 아닌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펼쳤다는 점도 똑같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비슷한 일생은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한 때 외신이 김대중을 아시아의 만델라라고 호칭한 적이 있었다.

김대중 전(前) 대통령 역시 만델라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1995년 만델라의 자서전을 직접 국어로 번역하였고 자신의 정치적 기치 중 하나로 만델라 정신을 뽑기도 했다.[26] 1997년 대선 당시에는 만델라가 자신의 딸을 통해 27년의 수감 생활동안 차고 있던 낡은 시계를 선물하기도 했다.

2001년 3월, 내한한 만델라는 청와대를 찾아 김대중과 회담을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두 사람의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이었으며, 이 자리에서 만델라는 무지개 공화국이라 소개하며 인류사회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강조했다. 만델라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햇볕정책도 호평하면서, 화해로 대북정책을 풀어나가라고 조언하였다. 김대중이 퇴임한 뒤에도 두 사람은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만델라는 애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2013년 12월, 만델라가 사망하자 김대중평화센터이희호 여사 이름으로 애도 성명을 발표하고 만델라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선물한 낡은 시계 등 여러 자료들을 공개하였다.


5.3. 마이클 잭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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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7월 21일, 만델라의 81세 생일 잔치에 참석한 마이클 잭슨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도 생전 친분이 깊었다. 두 사람 모두 흑인 사회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고, 한 때 인종차별 반대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인물이었기에 오바마와의 관계처럼 땔레야 땔 수 없는 사이였다. 마이클 잭슨 역시 만델라에 대한 존경심을 거듭 표하며 만델라의 재단을 자신의 콘서트 스폰서로 지정해 많은 금액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여러차례 만델라와 만나 면담을 가지기도 했다.

특히 1999년 열린 'Michael Jackson & Friends' 콘서트는 만델라 재단이 직접 스폰서로 참여했고, 만델라가 콘서트 개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What More Can I Give의 초판 제작 작업 당시에도 마이클 잭슨은 만델라와 앨범 컨셉에 대한 면담을 하며 조언을 듣기도 했다. 비록 2002년 최종 발매 때는 9.11 테러에 대한 추모와 전쟁 반대의 의미로 컨셉이 바뀌긴 했지만...

2009년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자 만델라는 재단을 통해 조사를 보내고 그를 애도했다. 참고로 만델라는 생전 마이클 잭슨과의 관계에 대해 묻는 질문에 "He's part of our family.(그는 우리의 가족입니다.)"라고 답한 바 있다. 얼마나 마이클 잭슨을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참고로 추도식장에서는 스모키 로빈슨이 조사를 대독해서 읽었다.


6. 기타[편집]


  • 오랫동안 옥바라지를 했던 아내 위니와 1996년 황혼 이혼을 해서 말이 많았는데 지위를 이용해 국정을 농단하는 등 전횡을 일삼고 외도까지 했다는 게 사유였다고 한다. 민족회의 시절에도 위니가 남편과 달리 추종자들에게 배신자들에 대한 보복행위를 허락하고 특히 스파이로 의심되는 흑인 청년을 살인하도록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는 등 폭력적 행위로 인해 평화적 해결책을 강구하던 만델라와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고 한다.[27][28] 참고로 만델라는 총 3번 결혼했다. 위니는 2번째 아내였고 저 때 이혼하고 2년 뒤 모잠비크 대통령 사모라 마셸[29]의 아내였던 그라사 마셸 여사와 삼혼을 했다. 그때 나이가 무려 80세.

  • 남아공 월드컵 개막식 당일에 증손녀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개막식에 불참하였다. 그런데 만델라의 조카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만델라가 FIFA의 지속적인 경기장 참석 요청을 받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조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협박 수준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매일 주치의로부터 만델라의 상태를 보고받아야 했고 가족들은 혹여 의사가 경기장 참석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내릴까봐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사실 FIFA는 넬슨 만델라라는 이름이 가지는 엄청난 상징성을 팔아먹기 위해 바로 얼마 전 증손녀를 잃고 슬픔에 잠긴 91세 노인을 축구장으로 끌고가려 했던 것이다. 이후 폐막식에도 불참하리란 예상을 깨고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하였다. FIFA의 더러운 속내와는 별개로 관중들은 비록 10분이 채 못 되는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부부젤라를 불면서 만델라를 환영하였다.

  • 저서로 뉴욕 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등이 있다. 국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어로 번역해 1995년 처음 출판했고 201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 에이즈 퇴치 운동에도 앞장섰다. 출소 당시까지만 해도 에이즈가 남아공에서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90년대 중후반으로 갈수록 에이즈가 갈수록 퍼져 에이즈 환자가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고 남아공의 성장잠재력과 평균수명을 갉아먹는 수준에 다다랐다. 재임 당시에 흑백화합 및 인프라 건설, 경제성장같은 여타 현황에 밀려 에이즈 문제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고는 하지만[30] 퇴임 직후에 본격적으로 에이즈 퇴치 활동에 앞장서고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자금을 모금하여 에이즈 고아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에이즈가 문화질병이라며 약을 처방하는 제대로 된 대책 대신 주스 섭취를 권하는 등 삽질을 거듭하던 타보 음베키에게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라며 격렬하게 비판했으며 자신부터 전처 소생인 큰 아들을 2005년 에이즈로 잃었다는 것을 공개하면서 에이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했고, 비싸게 약을 팔던 다국적 제약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까지도 했다.

  • 2016년 수능완성 영어책에 일화가 실리기도 했다.

  • 1996년 헌법 2조 9항의 인권선언에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기하는 조항이 있는데, 이것은 헌법에서 성적 지향에 대한 인권을 명시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는 결국 2006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이자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넬슨 만델라는 1990년대에 대통령직을 수행했고 2013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만델라가 옥살이를 하던 8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중들 사이에서 거짓 기억이 공유된 것. 여기서 만델라 효과라는 말이 생겨났다.

  • 2018년 5월 16일, 스페인의 축구 클럽 FC 바르셀로나가 넬슨 만델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남아공 리그의 챔피언인 마멜로디 선다운즈와 친선경기를 가졌다.# 문제는 바르샤가 비록 리그 우승을 확정짓기는 했으나 영광스러운 무패 우승까지는 2경기가 남아있었다는 것. 더군다나 만델라의 생일은 7월 18일이라서 굳이 시즌 중에 친선전을 치룰 필요가 없었다. 이 친선전 때문에 37라운드 레반테 UD 원정은 메시, 피케 등 주요 선수들이 벤치에 앉거나 아예 명단에서 제외되는 로테이션을 돌려야 했고, 결국 5:4로 패배하면서 무패 우승이 물건너가고 말았다. 이후 바르샤는 만델라컵에서 가볍게 승리했지만# 일부 안티와 팬들에겐 "친선경기에 불과한 만델라컵을 무패우승과 맞바꿨다"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반대로 말하면 바르셀로나가 그만큼 만델라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고 봐야 할지도.

  •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와 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무가베가 백인 권력자들에 맞서 싸우던 독립영웅이던 시절과 달리, 독립 이후 독재자 겸 극단적 흑인우월주의 성향으로 타락하는 것을 보며 만델라는 살아 생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짐바브웨는 나라도 안좋은 상황에서 독재자까지 한명 더 상대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됐다.

  •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장녀인 제나니 노시츠웨 들라미니가 2019년 주한 남아공 대사로 부임했다.

  • 2020년, 막내 딸이자 주 덴마크 대사를 지낸 진지 만델라가 향년 59세로 사망했다.# 코로나19 양성반응을 보였다고 유족들이 공개했다.# 2023년 9월 25일. 손녀 졸레카 만델라가 향년 43세로 사망했다.#

  • 2012년부터 발행중인 현행 남아공 랜드 지폐 앞면에 고정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 속의 넬슨 만델라 가짜 사진이 돌아다녔던 적이 있다. #

7. 어록[편집]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자유를 얻기 위한 대가를 치러 왔으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 1962년 11월, 노동자들의 파업을 유도한 혐의로 받은 재판 중 발언.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일들을 끝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히 영면할 수 있다. 나 스스로 그런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영원의 시간 속에 잠들 것이다."


"삶의 가장 큰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음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섬에 있다. (The greatest glory in living lies not in never falling, but in rising every time we fall.)"

- 1994년에 출판된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에서


"억압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다면 남에게 나의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내가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때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둘 다를 해방시키는 것이 나의 사명이었습니다."


"나는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나는 주춤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도중에 발을 잘못 내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커다란 언덕을 올라간 뒤에야 올라가야 할 언덕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내가 가야 할 머나먼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감히 꾸물거릴 수가 없습니다."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누구도 피부색, 배경 또는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도록 태어나지 않는다. 미워하게끔 배운다. 미워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사랑하는 것도 가르칠 수 있지 않은가.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자연스레 사람 가슴에 다가온다."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념대로 살 자유를 (사회에 의해) 빼앗겼을 때, 그는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다. (when a man is denied the right to live the life he believes in, he has no choice but to become an outlaw.)"


"여러분이 '성자' 에 대해서 '끝없이 노력하는 죄인' 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이상, 나는 성자가 아닙니다."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만약 ANC가 여러분에게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한다면, 여러분은 아파르트헤이트에 싸웠던 것처럼 ANC와 싸워야 합니다."[31]


"나는 대단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노력하는 한 노인일 뿐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았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가 우리 삶의 의미를 결정할 것이다."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항상 불가능해 보인다.(It always seems impossible until it's done)[32]



8.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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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만델라》의 한 장면. 데니스 헤이스버트 분.[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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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빅터스: 우리가 꿈꾸는 기적》의 한 장면. 모건 프리먼 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인지라 할리우드에서도 당연히 그의 생을 영화화한 적이 몇 번 있다. 대니 글로버(영화 《2012》에서 미 대통령으로 출연)는 만델라가 아직 옥고를 치르고 있던 1987년 HBO에서 제작한 TV 영화에서, 시드니 푸아티에이는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인 1997년, 데니스 헤이스버트는 2007년작 《굿바이 만델라》(원제 Goodbye Bafana)에서[34], 그리고 모건 프리먼은 2009년작 《인빅터스: 우리가 꿈꾸는 기적》[35]에서 각각 만델라로 열연했다. 모건 프리먼의 경우 만델라 본인이 자신을 연기한 최고의 배우라고 극찬한 적도 있었고, 만델라의 사망 이후 만델라를 추모하는 인파들이 만델라가 아닌 프리먼의 사진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만델라 사진 보여주면 모건 프리먼?이라고 하거나 모건 프리먼 사진을 보고 만델라?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물론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사례도 몇 번 있다.

2013년 영국에서도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이라는 제목에 영국 배우 이드리스 엘바 주연으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런던에서 만델라의 딸 등이 참석하여 시사회가 진행되던 도중 만델라의 부고가 전해졌다고 한다.

소설 《세계대전Z》에서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서 레데커 플랜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로 하고 레데커 플랜을 계획한 인종차별주의자폴 레데커를 불러와 도움을 요청한다.

본인이 영화에도 직접 출연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인 맬컴 엑스를 다룬 동명의 영화 맨 마지막 장면에 깜짝 출연. 흑인 어린이들에게 엑스의 정신을 가르쳐주는 교사 역으로 등장한다.

남벌에서는 오혜성에게 간접적으로 빅엿과 트롤링을 당하고 만다.

흑인 패션모델인 나오미 캠벨이 친할아버지로 여기고 존경하는 인물이다. 만델라 역시 그녀를 친손녀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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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턴케이프주 음베조.[2] 한자 단어 중의 대로(大老: 국가의 큰 원로, 큰 어르신)와 어감이 비슷하다.[3] "말썽꾸러기", "장난꾸러기"라는 뜻이다. 나쁘게 보면 문제아라는 뉘앙스일 수도 있지만, 자식 이름을 그런 뜻으로 짓진 않았을 것이다.[4] 정부언론외래어공동심의위원회의 심의에 따른 표기는 '롤리랄라'이지만 실제 코사어 발음은 [xolíɬaɬa\]이며 '홀리흘라흘라'로 표기할 수 있다.[5] 백인 이야기만 있으며 흑인들은 노예나 강도로 나오는 얘기[6] 영국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긴 했지만 소도시에서는 추장들의 권력이 유지되었다.[7] 만델라의 동료이며 남아공의 정치인 겸 민주화 운동가다.[8] 사실 만델라의 이유도 정당한 것이 그가 다니는 포트헤어 대학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흑인을 받는 대학이었으나 학식이 너무 형편없었다.[9] 물론, 투쟁 과정에서 인도 및 여러 유색인들을 대변하는 당들과도 같이 일한다. 또 공산당과도 손을 잡았는데 자서전에서 만델라는 공산당이랑 손 잡는건 무척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10] 그러나 이는 1948년 이후에나 공식적으로 실시 된 정책이다. 정식적으로 초기에 대항한 것은 인종차별 정책/사회일 뿐, 아파르트헤이트가 아니다. 하지만 시기가 겹쳐서 애매하긴 하다. 다만 아파르트헤이트의 전신격인 되는 정책들은 그때에도 있었으며 이 당시에도 대다수 흑인들은 참정권이 없었고, 소수의 부자나 토호같은 기득권층이나 투표권을 가졌을 따름이었다. 다만 컬러드 계층이나 아시아인들도 투표권을 가지기는 했기에 그나마 막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 뿐이었다.[11] 대표적으로 남아공 공산당 서기장이 된 조 슬로보(Joe Slovo)가 있는데, 그는 MK의 사령관직을 맡기도 했다.[12] 원래는 여러 해 동안 폭격은 건물에만 행해졌으나 나중에는 사람을 상대로 한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다.[13] 본래는 사형을 언도하려고 했으나, 만델라가 이를 잘 간파하여 은연중에 정치적인 재판으로 끌고가서 살 수 있었다. 만델라의 변호사 경험이 빛을 발한 것이다.[14] 영화 '굿바이 만델라'에서는 이 시기 만델라를 지켜보던 백인 교도관의 시점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참고로 이 교도관하고는 꽤 친하게 지내서 대통령 관저로 초대해올 정도였다고 한다.[15] 남아프리카 국민당의 일부 과격파들이 탈당하여 만들었다.[16] 참고로 남아공은 선거 방식이 다소 특이해서, 대통령을 의원내각제 총리 뽑듯 뽑는다. 즉, 총선을 해서 거기서 뽑힌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는다. 때문에 대통령도 하원의원이어야 한다.[17] 반대로 흑인들은 축구에 열광했다.[18] 타보 음베키는 만델라의 경제정책을 이어받아서 그가 재임하던 시기 남아공의 경제가 많이 성장했고 그 결과 아프리카의 맹주로 급부상하였지만, 그 과실은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갔고(이 시기에 남아공내에서 흑인 부유층과 중산층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이들의 숫자는 아무리 넓게 잡아봐도 전체 흑인의 20%가 채 안되는 수준이고, 백인층 기득권도 상당수 남겨놔 나머지 흑인들은 여전히 실업과 저임금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공공서비스 질 향상이나 범죄 문제 대처에도 좋진 않은 성적을 보이다 결국 권력다툼에 밀려 2009년 총선을 6개월 앞둔 시점에서 불명예 중도 퇴진하게 된다. 또 재임 초기 만델라와 대립하면서까지 에이즈에 대해 바보같은 대응을 했다가, ANC내에서도 욕을 먹는 등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래도 퇴임 이후에는 외교활동에 주력하고 있고 당내 정적 겸 후임 주마가 각종 스캔들로 욕을 먹으면서 평가가 전보단 나아진 편. 하여튼 그럼에도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까지 2020년대에도 ANC가 쭉 집권하고는 있다.[19] 원래 외국 정상이 방한하면 서울대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게 관행이다.[20] 김대중 대통령은 국내 언론 및 외신에서 아시아의 만델라라고도 한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과 징역살이, 해외 망명, 반대파의 극심한 저항, 정적 용서, 노벨 평화상 수상 등이 공통점으로 꼽힌다.#[21] 1980년대 각종 제재로 1%를 찍던 남아공 경제는 서방과 관계를 돈독히 한 만델라 집권 시기 4%대까지 상승한다.[22] 여담으로 이날 오바마가 추모 연설을 할 때 남아공 청중들로부터 그야말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오바마는 평소에도 만델라를 존경한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었는데, 그런 미국 첫 흑인 대통령이 넬슨 만델라 추모식에서 직접 연설을 하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23] 일본 황실 인사가 황족이 아닌 주요 인사 추모식에 직접 참석하는 예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후 2019년 덴노에 등극한다.[24] 구(舊) 사커시티 스타디움. 2010 남아공 월드컵의 주경기장이었다.[25] 아프리칸스어로 "토끼는 서두르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26]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을 재직 중인 인요한 교수도 1990년대 중반 대북사업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려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면했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델라에 대한 강연을 1시간 정도 해주며 보복이 아닌 화해와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실제로 1998년 2월, 대통령 취임식 때 자신의 정적이었던 전두환노태우를 초청하는 걸 보고 김대중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모습을 보고 그가 노벨상 감이라고 생각했다고.[27] 여담으로 결국 이렇게 노선 갈등 등이 겹쳐 이혼했지만, 2018년 위니가 사망한 이후엔 만델라 손녀들이 남아공 투쟁사에서 빼놓긴 힘든 그녀의 행적을 기념하는 등 그래도 영향력은 남아있는 모양.[28] 만델라의 이혼과 관련된 말이 명언/결혼 항목에 하나 있다. "결혼은 진짜 빡쎈거야. 결혼이 얼마나 빡쎈 거냐면,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어. 넬슨 만델라는 27년을 남아공 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는 27년 간 매일같이 당하는 고문과 매질도 참아냈고 40도가 넘는 남아공 사막에서의 강제노동도 견뎌냈어. 그 지옥 같은 27년 간을 참아내고 감옥에서 나왔는데 부인하고 겨우 6개월 지내고 이혼했다고." - 크리스 록...당연히 웃자고 하는 소리. 6개월만에 이혼하지 않았고 고문과 매질을 매일 당하지도 않았다. 만약 만델라가 진짜로 가혹한 고문이나 매질을 당했다면 남아프리카의 백인정권은 진작에 흑인들의 폭동이나 내전으로 개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만큼 만델라가 흑인들에게 중요한 인물이자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29] 생몰년도: 1933년 ~ 1986년[30] 이와 별개로, 당시 에이즈 운동가이자 가장 장수한 에이즈 환자인 은코시 존슨의 연설에는 찬사를 보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에이즈 퇴치 운동을 시작했다.[31] 만델라의 당이었던 ANC가 삽질을 할 때마다, 남아공의 반 ANC 세력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라고 한다.[32] 넬슨 만델라가 죽은 이후 영미권에 퍼져 그 외 세계에도 만델라가 했다고 알려진 말이나, 실제로는 영국의 수필가인 토머스 칼라일의 어록이다. 만델라의 실제 발언은 Every noble work is at first impossible(모든 고귀한 일은 처음에는 불가능하(게 보인)다)로, 사실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하긴 하다.[33] 만델라는 키가 185cm에 젊은 시절 복싱을 했던 경력도 있어서 사진 속의 덩치 꽤나 있는 모습이 고증오류까진 아니다. 실제로 젊은 시절의 만델라 사진을 보면 체격이 꽤 큰 편이란 걸 알 수 있다.[34] 만델라가 약 30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할 때 그를 전담했던 백인 간수와의 우정이 주 이야기. 2007년에 토요명화가 폐지된 이후 편성된 KBS 프리미어에서 방영했고 이후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KBS2에서 방송했고, 만델라의 사망 직후 KBS1에서 다시 방송했다.[35] 만델라의 취임 이듬해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선수권 우승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